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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위에 쟁반같은 달이 둥실 떠올랐다. 눈부신 빛을 타고 하늘의 칠선녀가 서서히 날아내렸다. 천지가에 내린 선녀들은 옷을 벗어놓고 첨벙첨벙 호수물에 뛰어들어 미역을 감았다. 그들 중에서 제일 나어린 막동이 천녀만은 미역감기에 흥취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는 백두산의 밤경치에 넋을 잃고 있었다.
어디선가 피리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옥쟁반에 구르는 구슬소리인 듯, 금소반에 구르는 옥소리런 듯. 한없이 미묘하고 아름다운 피리소리였다. 피리소리가 어쩐지 자기를 정답게 부르는 것만 같아서 천녀는 천지에서 나와 저도 모르게 피리소리 나는 곳으로 갔다.
소천지의 북쪽켠에 궁궐처럼 큰 바위돌이 우뚝 솟아있는데 그위에 피리를 부는 총각이 서있엇다. 그의 환한 얼굴이 맑은 호수에 비꼈는데 어느것이 달이고 어느것이 총각의 얼굴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피리소리까지 부드럽고 은은하여 천녀는 못박힌 듯이 서있었다.
피리소리는 천녀의 눈앞에다 아름다운 화면들을 펼쳐주었다. 태고연한 수림의 바다가 나타나는가 하면 백화만발한 언덕도 나타나고 무지개 비낀 강변이 나타나는가 하면 안개 속에 들쑥날쑥한 봉우리세계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때론 꾀꼬리 우는 듯, 때론 냇물이 조잘대는 듯 때론 파도가 울부짖는 듯 피리소리도 미묘하기 그지없었다.
"천녀야, 천녀야!"
자기를 찾는 언니들의 부름소리를 듣고서야 천녀는 아쉬운 심정으로 소천지를 떠났다.
그후부터 천녀는 천지로 미역감으로 내려오면 소천지가에 와서 피리부는 총각을 훔쳐보곤 하였다. 천녀는 저도 모르게 총각을 사랑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그의 짝사랑은 익을대로 익어서 그의 마음속에는 피리부는 총각밖에 없었다. 하늘의 모든 것이 인간세상의 것만 못해보였다. 인간세상의 피리부는 총각은 천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미남아였다.
어느 훈훈한 봄날, 칠선녀는 천지로 봄놀이를 내려오게 되었다. 천녀는 또 살그머니 빠지려 하였다.
"천녀, 또 어디로 가니?"
"소피(소변) 보러 가요."
"조건 천지에만 내려오면..."
"호호호..."
언니들은 눈을 흘기며 까르르 웃었다.
피리부는 총각이 못견디게 보고싶은 천녀는 소천지를 찾아왔다. 봄을 맞은 호수는 매혹적이었다. 여러 가지 색깔의 꽃들이 호수둘레에 만발하였다. 티없이 맑은 호수에는 흰구름이 동동 떴는데 어느것이 하느이고 어느것이 호수인지 분별하기 어려웠다.
소천지는 아름다워도 천녀는 서운함을 금할 수 없었다. 달밤에 총각이 앉았던 바위위에도 천지가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애틋한 마음으로 천지가를 거닐던 천녀는 동굴을 발견하였다. 산기슭에 있는 동굴은 그리 깊지 않았다. 그곳은 총각의 거처였다. 풋내기 살림기구와 옷가지들이 동굴 속에 있었다.
천녀는 제집으로 온 듯이 빨래감을 들고 소천지로 나왔다. 그는 옷을 깨끗이 빨아서 봇나무가지들에 걸어놓고 동굴안에 들어가서 밥까지 지어놓았다. (그이가 오면 어쩐담.) 천녀가 이렇게 귀밑을 붉히는데 사람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천녀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가슴이 콩콩 뛰였다. 그는 긴 생각을 굴려볼 사이도 없이 바위 뒤에 있는 숲속에 들어가 숨었다.
약재를 한짐 지고 굴 어구에 나타난 총각은 키가 훤칠하고 눈이 어글어글하고 의젓하게 잘난 총각이었다. 천녀는 첫눈에 마음이 쏠려서 봉긋한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사르르 감았다.
집으로 돌아온 총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때올랐던 옷들이 말쑥하게 빨려서 봇나무에 치렁치렁 널려있고 집안에서는 구수한 햇밥냄새, 반찬냄새가 풍겨왔다.
(누가 했을까? 올 사람이 없는데.)
총각은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배가 촐촐해진 총각은 집안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다. 밥과 반찬이 여느때보다 맛갈스러웠다.
달이 봉긋이 떠올랐다. 총각은 버릇대로 바위 위에 올라가 앉아서 피리를 불었다. 한참 성수나서 불어대는데 그윽한 향기가 풍기며 새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자기를 향하여 걸어오지 않는가! 총각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귀신이면 물러가고 사람이면 말을 하라."
여인은 총각 앞에 와서 고개를 나부시 숙이며 말하였다.
"놀라지 마세요. 소녀는 천궁의 칠선녀중 제일 작은 천녀야요. 인간세상이 그리워 그대를 찾아왔으니 물리치지 말아주세요."
"그렇다면 낮에 빨래를 하고 저녁을 지은이도 그댄가요?"
"네."
"그런줄 모르고 큰소리쳤으니 나무람하지 마오."
"천만에 말씀이얘요."
총각앞에 선 천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릿다왔다. 하르르한 흰옷은 날씬한 몸매를 가리웠고 윤기 반드르르한 머리에는 눈부신 진주들이 주렁지였고 그윽한 눈에서는 연연한 정이 풍기였다. 밝은 달빛아래서 부끄럼을 탄 천녀는 치마자락을 만지작거려서 더욱 애련해보이었다. 총각은 천녀한테 손을 내밀었다. 천녀는 두손으로 총각의 손을 잡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들의 가슴속에서는 이름할 수 없이 따사롭고 야릇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늘로 올라간 선녀들은 어머니에게 여쭈었다.
"어머님, 백두산천지에 가서 미역을 감던 천녀가 소피보러 간다 했는데 종적을 감추었나이다."
어머니 얼굴빛은 삽시에 새파랗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일을 천왕이 아는 날이면 큰 변이 일어날 것이었다. 어머니는 룡상에서 내리여 오락가락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내가 몇 번이나 이르던. 백두산에 내려가지 말라고. 끝내 일을 치고야 말았구나!"
"어머니, 그것도 천녀의 수작이야요."
"누구 수작이든 따를 게 뭐냐?"
선녀들은 머리를 숙인채 한마디 답변도 못하였다.
어머니는 자기가 가장 믿는 금강신을 불러들였다.
"천녀가 백두산에 가서 잃어졌으니 한번 내려가보아라."
"예."
금강신은 그 자리로 백두산에 내려와서 천녀를 찾았다. 손 바닥만한 백두산을 아무리 훑어보아도 천녀는 없었다.
기실 천녀는 하늘에서 자기를 찾을줄 알고 동굴속에 들어간후 나무단으로 굴어귀를 막게 하였던 것이다.
금강신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초조해졌다. 그는 제 힘에 부치는 일인지라 천왕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천왕님, 천녀가 백두산에 내려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사옵니다."
천왕은 대뜸 노하였다.
"그년은 천규를 짓밟고 천궁을 더렵혔으니 용서치 못하리로다."
이렇게 말하는 천왕의 흰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엄벌이 내리리라는 예감이 든 어머니는 얼굴빛이 새파래졌다. 말하면 말한 대로 하는 천왕의 앞이라 어머니는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여봐라, 변술대신을 불러들여라."
천왕의 부름이 떨어지기 바쁘게 변술대신이 천왕앞에 나타났다.
"당장 백두산으로 내려가라. 천녀를 찾으면 풀로 만들고 그를 홀린 사람을 찾으면 짐승으로 만들어라."
"예잇!"
변술대신의 눈은 비상이 밝아서 누구도 그를 속이지 못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변술대신의 뒤를 따라나오며 사정하였다.
"그 애의 죄 죽여도 마땅하나 천왕과 내가 애지중지하던 애이니 그 애를 갸륵히 생각하고 풀을 만들더라도 귀중한 풀로 만들거라."
"예이!"
변술대신은 그 즉시로 백두산으로 내려갔다. 천궁에서 그렇게까지 고약스럽게 다스리라고는 생각못한 천녀와 랑군은 신혼생활의 꿀도가니속에서 아기자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약초캐러 떠나는 난군을 보고 천녀는 청을 들었다.
"함께 가요, 그대가 산에 가고 혼자 있으면 얼마나 외로운지 아세요."
데리고 가자니 섬약한 몸으로 험악한 산발을 톺을 일이 가슴아프고 집에 두자니 어쩌다 말하는 첫소원이여서 낭군은 망설렸다.
"뭘 망설이세요, 자, 가자요."하고 천녀가 팔을 잡아 끄는 바람에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같이 떠났다.
언제나 홀로 다니던 낭군은 걸음이 절로 나갔다. 꽃같이 고운 아내와 함께 약초캐러 다니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늘도 더 맑아진 것만 같고 대지도 더 정다와진 것만 같았다. 강을 만나면 천녀를 안아서 건늬웠다. 천녀는 그의 품에서 생글거려서 낭군은 무거운줄을 몰랐다. 험악한 산비탈을 만나면 랑군은 먼저 올라가서 천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불로초며 영지며 하는 약들을 어느새 한망태를 캐였는지도,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는지도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바위 밑에 있는 샘물곁에다 점심그릇을 풀어놓고 화기애애하게 점심을 먹는 그들은 이것이 마지막생활이라곤 생각지 못하였다.
점심을 먹고 난 그들은 소나무그늘 밑에서 나란히 누워서 낮잠을 청하였다.
잎새들의 사이로 비쳐드는 해빛이 아롱지여 그들의 몸에는 꽃이 피어난 듯하였다.
낭군은 빨간 머리수건밑으로 흘러나온 천녀의 귀밑머리를 훔쳐주다가 살풋이 잠이 들었다.
꿈이 올가말가할 때 "낭군님!"하는 애절한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 깨여나보니 천녀는 간곳이 없고 빨간 달을 쓴 풀 한포기가 가슴에 안겨있었다.
"천녀! 천녀!"하고 부르며 아무리 찾아보아도 안해는 간 곳이 없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사방으로 헤매며 아내를 찾던 낭군은 무거운 다리를 끌고 소나무밑으로 돌아왔다. 그렇듯 정들던 곳이 한없이 스산하였다. 그는 가랑잎으로 몸을 싸고 밤을 새울 수밖에 없었다. 누워있노라니 천녀가 못내 그리웠다. 잠이 들자 빨간 수건을 곱게 친 안해가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낭군님! 낭군님! 소녀는 천왕의 벌을 받아서 인삼이란 풀이 되었사와요. 머리에 붉은 달을 쓴 풀을 보시면 저를 만난 듯 반겨주고 사랑해주셔요."
너무도 애달픈 부르짖음이었다. 손을 잡자 하니 천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하도 아쉬워서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동터오는 여명에 곁을 살려보니 과연 빨간 달을 곱게 쓴 새파란 풀이 어여쁘게 서있었다.
"님이여! 님이여! 내 사랑하는 님이여! 이게 어인일이요, 이게..."
낭군은 황소울음을 터쳤다. 한 바탕 울고 난 그가 인삼잎이라도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드니 그의 손은 얼른 두발쪽으로 변하지 않았겠는가! 그제야 자신이 짐승으로 변하였구나 하는 몽롱한 의식이 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천녀와 총각은 인삼과 꽃사슴으로 되었다 한다. 인삼에 붉은 달이 맺게 된 것은 천녀가 인삼으로 변할 때 빨간 수건을 머리에 쳤기 때문이고 사슴의 몸에 알락무늬가 돋치게 된 것은 총각이 소나무밑에서 낮잠을 잘 때 해빛이 아롱아롱 그의 몸을 비추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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