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KBS 스페셜 ‘용서’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 다큐에서 소개된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을 해친 살인범을 용서했다.
연속살인범에 의해 희생된 가족들이 그 살인범을 용서하면서
죽은 이에 대한 슬픔과 살인범에 대한 분노를 정화시키는 것처럼,
날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또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현대인들에게
플라톤의 『크리톤』과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은
용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정치적 반대자들의 모함에 의해 구속된 소크라테스는
그의 절친한 친구 크리톤으로부터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제시받으나 완강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앙갚음으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해서도 아니 되는데, 이는 어떤 경우에도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일세.”
소크라테스의 이런 용서에 대한 철학은
마치 중남미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 『영혼의 집』 에필로그에서
정치가 에스테반과 클라라의 딸이자,
혁명가 미겔의 아내 알바의 읊조림을 연상케 한다.
아버지 에스테반과 자신의 농장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에스테반 가르시아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몸과 영혼을 파괴당한 알바는
마지막에 가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증오심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에스테반 가르시아와,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그리고 클라라의 노트들과 내 어머니의 편지들과
트레스 마리아스의 대장(臺帳)들, 그리고 내 앞의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다른 많은 문서들로부터 사건들을 하나로 짜 맞추면서,
나는 내 증오심의 불꽃이 꺼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마땅히 복수를 당해야할 모든 사람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복수는
똑같은 냉혹한 양식(儀式)의 다른 한 부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팍팍하다고 한다.
삶이 두 어깨를 무겁게 짓누를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받고 상처주기가 쉽다.
이럴 땐 치열한 현실에서 조금 벗어나 세상을 관조하고
나를 되돌아보는 데 책만한 스승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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